여행 견문록

21.08.06 [공주/마곡사] 채우려 하면 채워지지 않고, 비우려 하면 채워지는 것임을

빠블리또 2025. 1. 30. 11:04

모든 일이 힘에 부치고 버겁게 느껴진다. 사소한 것도 환멸이 난다.

해소법은 간단하다. 잠시 멈춤이 필요할 뿐이다.

해탈문, 불교 세계에 들어서며 해탈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래서 무작정 도망치듯 공주로 떠나왔다. 반복적인 바운더리를 벗어나 생각 스위치를 off 하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자는 다짐. 그렇게 비움의 여정은 시작했다.

에어팟 프로 케이스, 비워내겠다는 포부와 함께 바로 잃어버린 뚜껑.


다행히 충남권은 여전히 방역 단계가 강화되지 않은 상태. 더군다나 평일 산사에 템플 스테이를 하러 가면 서울처럼 많은 인파를 마주칠 일도 없다.

마곡사로 들어서는 길.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걸으며 매미 소리를 들으면 내가 산 중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으면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 그리고 고요 속에 들어차는 건 내 숨소리 하나 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계곡물에 발만 담그고 가만히 앉아있기. 눈을 감고 온 신경으로 자연의 기운을 느껴본다.


산사에서의 일상은 확실히 여유가 느껴진다. 어느 하나 재촉하지 않으며 가만히 있다보면, 한여름인 것도 잊어버리고 말라가는 땀방울에 마음 속 품어왔던 번뇌도 같이 날아가 버린다.

*번뇌 :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


스님과의 차담에서 좋은 말씀도 주셨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일시적인 것. 일희일비하며 휩쓸리지 않고 한결같음을 유지하기. (중도 中道)

맞는 말이다.
즐거움을 느끼면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을 잃을 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괴로움은 하나가 사라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또 다시 나타난다.

이런 일시적인 좋고 나쁨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결국 마음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둘째날 아침에는 공양 후 절밭에서 깨를 터는 작업을 도우러 갔다. 인솔자 분과 같이 템플스테이 하던 한 커플의 뒷모습.

1
밭에서 깨를 터는 중, 깔아놓은 포 위에 모든 깨가 떨어지지 않고 더러 땅에 흩어졌다.

그때 같이 작업하시는 인부왈,
“어후, 참새들도 먹고 살아야지.”
“새들한테도 보시를 해?”
한 스님이 웃으시며 답하셨다.

*보시 : 베풀어주는 일.

2
태화산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인솔자 분이 땡볕에 기어가는 지렁이를 발견하셨다.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지렁아, 얼른 기어가서 땅 밑에 들어가라. 그러다 말라 죽는다!”

살생을 하지 않고 한낱 미물에도 자비를 베푸는 불자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 에피소드들.

저녁 예불에 어우러지는 자연과 목탁 소리.

이틀간의 템플 스테이를 통해 깨달았다.

마음은 채우려 하면 채워지지 않는다.
한 가지 욕구를 충족한다고 결코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를 채우면 둘이 필요하고, 둘을 채우면 셋이 필요하다. 그게 어떤 욕구든.

역설적이게도 마음은 비우려고 하면 더 채워진다. 욕구를 지우면 그 자리에 좋은 기운이 계속 들어차게 된다. 애초에 채우는 데 필요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방사에 평온하게 누워있던 순간을 서울에 돌아와 그림으로 남겼다.


지금 당면한 순간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상황이라도 그걸 대하는 나의 태도에 따라 흐름의 판도는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