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삶은 자아를 향해 가는 길이며, 그 길을 추구해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추구하는 좁을 길을 암시한다. 지금껏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었음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 서문
《데미안》을 두 번째 집어 들었다. 첫 번째로 읽었을 때는 스페인에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중 전자도서관을 통해 스마트폰으로 읽었다. 그 당시에 깨알만 한 글자를 작은 화면로 읽어야 했던 탓인지 줄거리를 연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띄엄띄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탄생 140주년을 맞아 책의 초판본 표지 디자인을 그대로 살려 책이 리커버 됐다기에 잽싸게 구매를 해버렸다. 그렇지만 실제로 책을 읽는 것은 2019년, 소설이 출시된 지 딱 100년이 되어서였다.
이 소설은 헤세의 영혼의 성장 기록으로 통한다. 초판본은 소설의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에밀 싱클레어'라는 작명으로 출판되었는데, 당시 이미 유명한 작가였던 헤세는 소설을 자신의 이름을 지워진 채 작품성만으로 평가받고 싶어 가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에 한 평론가의 문체 분석에 의해서 헤세의 작품인 것이 밝혀졌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 p137
주인공의 유년 시절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그의 이념 속에는 두 가지의 대조적인 세계가 공존한다. 가령, 유년 시절에는 가족들과 종교 활동이 있는 집 안의 깨끗하고 선한 세계와 이상한 소문과 범죄자들, 혼란 등이 존재하는 어두운 바깥 세계다. 이러한 대조적인 세계 중에서 주인공이 속한 곳은 성장해가는 과정의 어떤 우연한 경유 또는 본인의 선택에 의해 계속 옮겨간다. 그리고 세계의 이동이 일어났을 때 주인공은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같았다. 마치 새끼 새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껍데기를 깨야하는 것처럼 자아 속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 즉 새로운 자아로 성장하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다.
"그래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꿈을 발견해야 하는 거예요. 발견하고 나면 길은 한층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어요. 또다시 새로운 꿈이 나타나지요.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돼요." - 에바 부인, p218
어린 시절 내가 가졌던 가장 큰 고민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실존적 이유에 대한 고민은 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왜 싫은 것도 해야만 하는지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태 지속해온 삶은 바로 그러한 이유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실천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능 시험을 대비하고, 대학에 입학하고, 해마다 해외여행을 가고, 스페인에 장기간 거주하고, 언어 공부를 지속한 모든 과정은 다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과 실천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항상 달성해야 할 새로운 목표를 가슴에 품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목표를 이루어오다가 지금 시점에 다다라서 제동이 걸렸다. 이제는 부모님의 슬하에서 편안하게 살아오던 것들을 뒤로 한채 새로운 차원의 나로 탄생해야만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속에 여전히 불완전한 내가 존재하고,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장애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의 맹목적인 추구가 제동이 걸렸다. 내가 유지해오던 삶의 탄력성을 지속할 수가 없어서 매일매일이 답답하고 또 서글프기도 하다. 그리고 수시로 나를 들여다보고 그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점검을 해야만 한다.
《데미안》을 지금 읽고 싶었던 이유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나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서 불안정한 미래를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찾고 싶었다. 감상문을 쓰고 있는 현시점에 돌아보니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나 싶다. 미래에 확신을 가지기 위한 명확한 증거가 아니라 내가 잘해왔다는 것, 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는 삶 자체에 대한 믿음 말이다. 결국 실존적 물음의 해답은 삶을 믿고 주저함 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차원을 넘어 성장하고자 하는 자에게 쉬운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삶을 비추었을 때 쉬워 보이는 것이라도 실제로 그 삶을 영위하는 당사자에게는 나름의 고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의 합리화는 하고 싶지 않다. 실존하는 누구라도 응당 아파야 한다는 합리적인 당위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아픔이라는 것조차도 이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조금 더 담대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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